
강원도 홍천군 수타사 계곡길은 세상의 소음을 뒤로하고 자연이 건네는 침묵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특별한 여정이다. 맑고 투명한 계곡물과 하늘 높이 뻗은 소나무 군락, 천년을 이어온 고찰이 만들어내는 풍경은 사계절 내내 빼어나지만 겨울철의 정적은 그 어떤 계절보다 강렬하게 다가온다. 도심에서는 결코 경험할 수 없는 청정한 대기와 사람의 발길이 뜸한 산책로가 주는 해방감은 걸음마다 내면을 정리하게 만든다. 통일신라시대 창건된 수타사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이 공간은 진정한 휴식을 갈망하는 모든 이에게 조용하지만 확실한 위안을 가져다준다.
1. 수타사 계곡길 – 침묵 속에 울리는 물의 노래
주차장에서 내리는 순간부터 예사롭지 않았다. 차가운 바람이 얼굴을 스치는데도 전혀 불쾌하지 않았다. 오히려 상쾌했다. 도심의 탁한 공기와는 차원이 다른, 뼛속까지 파고드는 맑은 산소가 온몸을 깨웠다. 수타사 입구부터 시작되는 계곡길은 첫발을 내딛는 순간 나를 사로잡았다. 나무 데크와 자연 그대로의 흙길이 자연스럽게 교차하며 이어지는데, 폭이 충분히 넓어 두 사람이 나란히 걸어도 여유로웠다. 길을 따라 흐르는 계곡은 겨울의 추위에 대부분 단단히 얼어붙어 있었다. 하지만 햇빛이 닿는 곳만큼은 얼음 아래로 맑은 물이 졸졸졸 흐르고, 그 소리는 놀라웠다. 주변이 조용하니 물소리가 더 선명하게 귓가에 들어왔다. 눈이 소복이 쌓인 바위들 사이로 흐르는 물줄기를 바라보고 있자니 멍하니 서 있게 됐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데 마음이 정리되는 신기한 경험이었다. 계곡 위로 걸쳐진 작은 나무다리를 건널 때마다 발밑으로 보이는 얼음 결정들이 햇살을 받아 반짝였다. 자연이 만든 보석 같았다. 길 양옆으로는 소나무들이 빽빽하게 늘어서 있었다. 키가 어마어마하게 큰 소나무들인데, 가지마다 눈이 살짝 내려앉아 있어 더욱 운치 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나뭇가지가 흔들리며 눈가루가 후드득 떨어지고, 솔잎 스치는 소리가 작은 음악처럼 들렸다. 이곳의 숲길은 사람 손이 닿지 않은 듯한 야생의 기운이 살아있으면서도, 걷기에는 전혀 불편하지 않게 최소한만 정비되어 있었다. 중간중간 놓여 있는 벤치에 앉아 계곡을 내려다보며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특히 범종루 전망대에 올랐을 때 펼쳐진 광경은 잊을 수가 없다. 계곡을 따라 뻗어나간 하얀 숲이 끝없이 펼쳐졌고, 그 위로 옅은 안개가 걸려 있었다. 수묵화 속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었다. 먹물을 찍어 그린 듯한 소나무들과 하얀 눈, 그리고 그 사이로 흐르는 계곡, 카메라에는 담을 수 없는 아쉬움으로 눈과 귀로 직접 느낄 수 있는 아름다움이었다. 이 길은 총 3km 정도라고 안내판에 적혀 있었다. 보통 한 시간이면 충분한 거리다. 하지만 나는 두 시간 가까이 걸렸다. 자꾸만 멈춰 섰기 때문이다. 풍경이 너무 좋아서, 물소리가 너무 맑아서, 바람이 너무 상쾌해서. 이곳에서는 저절로 속도가 느려졌다. 길 전체가 나만의 공간처럼 느껴졌다. 걷기만 해도 정화되는 기분이었다. 복잡했던 머릿속이 비워지고, 쌓였던 피로가 녹아내렸다. 이래서 사람들이 겨울에도 수타사 계곡길을 찾는구나 싶었다.
2. 수타사 – 천년의 시간이 머문 고요한 성소
계곡길을 따라 천천히 걸어 올라가니 어느새 수타사에 도착했다. 통일신라시대에 세워진 이 절은 홍천에서 가장 오래된 사찰 중 하나다. 겨울에 찾은 수타사는 여름이나 가을과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를 풍겼다. 더 깊고, 더 고요하고, 더 엄숙했다. 대웅보전 앞마당에는 눈이 얇게 덮여 있었고, 발자국 하나 없었다. 아무도 밟지 않은 눈을 보고 있자니 왠지 조심스러워졌다. 이곳의 고요를 깨뜨리면 안 될 것 같았다. 절집 특유의 단청과 기와지붕이 하얀 눈 속에서 더욱 선명하게 드러났다. 붉은색과 청록색의 단청 무늬가 흰 배경 위에서 강렬한 대비를 이뤘다. 그런데 화려하다기보다는 정갈했다. 과하지 않았다. 딱 필요한 만큼만 칠해진 듯한 절제된 아름다움이었다. 경내는 너무나 조용했다. 사람 소리는 들리지 않았고, 대신 멀리서 목탁 소리와 종소리가 은은하게 들려왔다. 그 소리를 듣고 있자니 자연스럽게 마음이 가라앉았다. 절로 손이 모아졌다. 내가 방문한 날은 운 좋게도 주지 스님과 짧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스님은 마당을 쓸고 계셨는데, 내가 인사를 드리자 환하게 웃으며 맞아주셨다. "겨울이야말로 수타사 본래의 모습을 느낄 수 있는 계절입니다." 스님의 말씀이었다. 방문객이 적은 만큼 공간 자체의 숨결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고 하셨다. 실제로 그랬다. 다른 계절이었으면 관광객들로 북적였을 텐데, 겨울의 수타사는 온전히 나에게만 집중할 수 있게 해 줬다. 경내에는 보물로 지정된 석등이 있었다. 오래된 석재로 만들어진 이 석등은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새겨져 있었다. 표면이 거칠고 색이 바랬지만, 그래서 더 귀하게 느껴졌다. 석등 옆에는 수령이 백 년이 넘은 은행나무가 서 있었다. 겨울이라 잎은 다 떨어졌지만, 굵은 가지들이 하늘을 향해 뻗어 있는 모습이 웅장했다. 그 나무 아래 잠시 앉아 있었다.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아니, 시간이라는 개념 자체가 무의미해졌다. 과거와 현재가 한데 섞여 있는 듯한, 묘한 감각이었다. 건물 하나하나가 정직하게 지어졌다. 허투루 만든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오래된 것들에서만 느낄 수 있는 단단함과 견고함이 있었다. 현대식 건축물처럼 세련되지는 않지만, 그보다 훨씬 더 깊은 울림이 있었다. 수타사는 나에게 위안이 되는 수행처였다.
3. 주변 명소 – 숲과 예술, 그리고 여유가 있는 곳
수타사만 보고 돌아가기에는 아쉬웠다. 주변에 들를 만한 곳들이 꽤 있었기 때문이다. 첫 번째로 찾아간 곳은 홍천 무궁화수목원이었다. 수타사에서 차로 10분 정도 거리에 있어서 잠깐 들러 가기에 적당했다. 겨울이라 무궁화는 볼 수 없었지만, 대신 침엽수들이 만들어내는 설경이 압권이었다. 수목원 안으로 들어서자 또 다른 세계가 펼쳐졌다. 소나무, 잣나무, 전나무들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었고, 그 사이로 조성된 산책로는 평탄하게 정비되어 있었다. 트레킹 코스가 짧게 여러 개로 나뉘어 있어서 체력에 맞게 선택할 수 있었다. 나는 30분 코스를 골랐는데,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사람 손이 많이 닿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숲이라 그런지 나에게 오는 에너지가 굉장했다. 나무들이 뿜어내는 피톤치드가 공기 중에 가득한 게 느껴질 정도였다. 혼자 걷고 있는데도 전혀 외롭지 않았다. 오히려 혼자여서 더 좋았다. 겨울 산이 이렇게 고요할 수 있구나 싶었다. 눈 덮인 나무들 사이를 걸으며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폐가 정화되는 느낌이었다. 두 번째로 들른 곳은 홍천미술관이었다. 규모는 크지 않았지만 알찬 공간이었다. 지역 작가들의 작품을 중심으로 전시가 꾸준히 열리고 있었다. 내가 방문했을 때는 자연을 주제로 한 회화 전시가 진행 중이었다. 전시관 내부는 따뜻하게 난방이 되어 있어서, 추운 바깥에서 들어오니 온몸이 녹는 것 같았다. 관람객은 나를 포함해 서너 명밖에 없었다. 덕분에 조용하게, 천천히 작품을 감상할 수 있었다. 전시된 그림들은 대부분 강원도의 자연을 담고 있었다. 산, 계곡, 숲, 눈. 내가 조금 전까지 걸었던 수타사 계곡의 풍경과 너무나 닮아 있었다. 작가가 본 자연과 내가 본 자연이 캔버스 위에서 만났다. 그중 한 작품이 특히 인상 깊었다. 눈 내린 소나무 숲을 그린 작은 유화였는데, 붓터치가 거칠면서도 섬세했다. 그 그림을 보고 있자니 아까 걸었던 계곡길이 다시 떠올랐다. 여행의 여운이 그림을 통해 더 길게 이어지는 기분이었다.
여행을 마치며
겨울 여행을 망설이는 사람들이 많다. 춥고, 볼 것도 없을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도 그랬다. 하지만 그곳이 가지고 있는 본연의 모습과 분위기를 느끼려면 꼭 겨울 여행을 추천한다. 얼어붙은 계곡 옆을 걸으며, 천년 고찰의 고요 속에 서 있으며, 한적한 카페에서 여유를 음미하며 보낸 하루. 그 모든 순간이 조용하지만 강렬한 힘으로 나를 감싸 안았다. 나는 이 겨울이 끝나기 전에 다시 그 길을 걷고 싶다. 눈이 더 많이 내려서 숲 전체가 하얗게 뒤덮인 날, 새소리조차 멀게 들리는 그 고요 속에서 다시 한번 나를 만나고 싶다. 수타사 계곡길은 내게 확실히 말해줬다. 겨울은 끝이 아니라, 잠시 멈춰 서서 깊게 숨 고르기에 가장 완벽한 계절이라는 것을. 만약 당신이 진짜 쉼을 찾고 있다면, 망설이지 말고 이곳으로 가라. 그 길 위에서 당신도 분명 당신만의 고요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