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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하동 평사리 들판, 박경리 문학관, 악양시장

by 여행 줌마 2026. 1. 22.

경남 하동 평사리들판 겨울 풍경 사진

경남 하동군 악양면의 평사리들판은 소설 <토지>의 무대이자, 지금도 그 정취를 고스란히 간직한 살아 있는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넓게 펼쳐진 황금빛 들녘과 지리산 자락 아래 고즈넉하게 자리 잡은 고택들, 그리고 겨울바람을 품은 섬진강의 잔잔한 흐름까지, 이 모든 것들이 지난 시간의 의미를 담고 있다. 분명한 건, 이곳은 단순히 풍경이 아름다운 곳이라기보다 마음이 쉬어가는 곳, 빠름보다 깊이를, 소음보다 고요를 원하는 이들에게 꼭 소개하고 싶은 곳이다.

1. 평사리 들판 – 고요함이 흐르는 겨울의 시간 속으로

처음 이곳을 찾게 된 건 정말 우연이었다. 하동이 섬진강과 차밭으로 유명한 건 알았지만, 평사리들판이라는 이름은 나에게 너무 낯설었다. 하지만 도착한 순간, 그동안 상상하지 못했던 풍경을 만났다. 지리산 능선 아래 끝없이 펼쳐진 논과 밭, 그리고 그 사이로 흐르는 바람. 모든 것이 잔잔했고, 묘하게 평온했다. 도로에서 차를 세우고 논길을 따라 걷기 시작하자, 들판 특유의 흙냄새와 서늘한 겨울 공기가 나를 감쌌다.‘평사리’라는 지명은 넓은 들판을 의미하며, 이곳은 조선시대부터 곡창지대로 불렸다. 그 너른 들판 위에 바람은 소리 없이 머물고, 겨울에도 마르지 않은 논물은 하늘을 비추듯 맑다. 초입에는 소설 <토지>의 무대가 된 최참판댁이 자리하고 있는데, 이곳은 실제 고택을 복원한 문화공간으로, 돌담과 기와지붕이 한겨울의 하늘 아래 묵직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계절마다 느낌이 다르겠지만, 나는 특히 겨울의 정적 속에서 이 집이 가지고 있는 묵직한 시간이 더 선명하게 느껴졌다. 평사리들판은 관광지가 아니다, 지나는 길에 풍광에 끌려 머무르는 곳, 어디로 걷든 자유롭고, 어디에 멈춰 서든, 이곳을 알아봐 주는 사람만이 이곳의 진짜 매력을 느낄 수 있다. 들판 중앙에는 ‘평사리 공원’이라는 작은 쉼터가 있고, 이곳에서 바라보는 전경이 특히 인상적이다. 멀리 지리산 자락과 함께 낮게 드리운 안개, 갈대 사이를 스치는 바람 소리, 나처럼 이곳에 이끌려 온 몇몇 여행자들. 그 조화가 무척이나  자연스러웠다. 이곳의 겨울은 도심에서는 보기 힘든 ‘빈 풍경’이, 이곳에서는 가장 진하게 채워진다. 나는 아무 말도 없이 한참을 그 들판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시간이, 어떤 위로보다 나를 따뜻하게 감쌌다.

2. 박경리 <토지> 문학관 – 이야기 안에서 만난 삶

평사리들판의 끝자락, 오래된 돌담길을 따라 걷다 보면 박경리 문학관이 나타난다. 소설 <토지>는 이 지역의 실제 지명과 풍경, 사람들의 삶을 바탕으로 완성된 대하소설인데, 그 배경이 되는 곳이 바로 이 평사리다. 문학관은 크고 화려하진 않지만, 오히려 그 소박한 규모가 더 마음에 와닿았다. 실내에는 박경리 작가의 친필 원고, 집필 노트, 당시의 사진과 자료들이 정갈하게 전시되어 있었고, 한쪽에는 소설 속 등장인물과 그 배경이 된 마을의 지도도 놓여 있었다. 나는 박경리 작가의 팬은 아니었지만, 이곳을 방문하고 나서 소설 <토지>를 다시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문장 한 문장 속에 녹아든 지역의 정서와 그 시대 사람들의 삶이, 전시된 사진과 함께 머릿속에 입체적으로 그려졌기 때문이다. 특히 인상 깊었던 건 ‘삶이 곧 이야기’라는 문구였다. 실제로 하동 사람들의 억척스러운 삶, 그리고 사계절이 만드는 환경의 변화가 박경리 작가의 시선을 통해 어떻게 문학으로 확장되었는지, 그 흐름이 자연스럽게 이어져 있었다. 밖으로 나와 마당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하늘은 맑았고, 들판 위로는 해가 천천히 기울고 있었다. 기념품점에서 산 얇은 시집 한 권을 들고 문학관 뒤편으로 난 산책로를 따라 걷다 보니, 나도 모르게 ‘내 이야기는 지금 어디쯤일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문학관은 단지 누군가의 업적을 기리는 장소가 아니라, 한 개인의 삶이 어떻게 공간과 연결되고 또 다른 시간을 어떻게 만들어내는지를 보여주는 증거였다. 그 속에서 나 역시 한 사람의 이야기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 벅차게 다가왔다.

3. 악양시장과 섬진강변 마을 – 느린 하루를 완성하는 사람 냄새

문학관에서 차로 5분 거리에 있는 ‘악양시장’은 규모는 작지만, 이 지역 특유의 분위기를 고스란히 간직한 재래시장이다. 나는 여행을 갈 때마다 전통시장을 일부러 찾아다니는 편인데, 이곳은 그중에서도 인상 깊었다. 정기장은 5일마다 열리지만, 상설 가게들도 제법 다양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특히 겨울철에는 하동 특산물인 대봉감, 유자, 시래기 말린 것들이 많이 보였고, 어르신들이 직접 수확해 온 채소며 산나물은 흙냄새가 그대로 났다. 시장 안 국밥집에서 따끈한 재첩국을 먹었다. 섬진강 인근에서 직접 잡은 재첩으로 끓인 국물은 맑고도 깊었고, 밥 한 숟갈 말아먹으니 추위가 사르르 녹았다. 가게 주인아주머니는 “이 동네 물이 좋아서 국물이 다르다”라고 말했는데, 빈말은 아닌 것 같았다. 옆 테이블에선 동네 어르신 몇 분이 담소를 나누고 있었고, 나는 그 조용한 대화 속에 묘한 위로를 받았다. 식사를 마치고 섬진강을 따라 조성된 산책길을 걸었다. 겨울 강은 유독 고요했다. 철새 몇 마리가 잔잔한 수면 위를 가로지르며 하늘로 날아올랐고, 나도 같이 하늘로 오르는 것처럼 잠시 몰입되어 있었다. 이 길은 따로 안내판이 많지 않아서 더욱 좋았다. 어디로든 이어지고, 어디서든 멈춰도 되는 길. 나는 걸음을 늦추며 주변을 더듬듯 살펴보았고, 그 안에서 마을 사람들의 삶이 묻어나는 흔적들을 발견했다. 오래된 빨래터, 강변 논에 지어진 비닐하우스, 멀리서 들려오는 마을 방송. 아궁이 장작불 냄새, 그 모두가 어린 시절 고향생각에 빠져들게 했다. 악양은 자연과 사람, 소리 모두 풍경을 만드는 동네였다. 나와 같은 여행자에게는 쉼이 되고, 주민에게는 삶이 되는 곳. 이곳의 겨울은 특별하지 않지만 특별했다. 그런 일상이 부러웠고, 한편으론 고마웠다. 그 속에 나도 잠시 머물 수 있어서.

여행을 마치고

겨울의 하동은 흰 눈이 내리지 않아도 충분히 차분하고, 조용하며, 의미 있다. 지리산 남부 끝자락에 위치한 이곳은 해발 고도가 낮아 겨울에도 접근이 쉬우며, 들판 너머로 보이는 지리산 능선은 황혼이 질 때 특히 아름답다. 나는 다시 이곳에 가고 싶다. 겨울바람에 실려오는 흙냄새, 평사리마을 돌담길을 걷는 기분, 섬진강변 산책로에서 들려오는 강물 소리까지. 그 모든 게 마음 한편에 남아 있는 이유이다. 삶이 벅차거나, 문득 멈추고 싶을 때, 나는 다시 하동을 떠올릴 것이다. 그때도 아마, 오늘처럼 이 들판은 조용히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