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누군가는 진짜 자연을 묻는다. 관광객으로 북적이지 않고, 상업적 손길이 덜 닿은 곳. 조용히 걸으며 마음을 비울 수 있고, 그 공간이 나를 먼저 안아주는 곳. 그런 질문의 해답이 바로 이곳, 경북 영양 수비계곡이었다. 깊은 산과 협곡 사이를 흐르는 투명한 물줄기, 크고 작은 소나무가 어우러진 숲, 길을 막지 않고 마음을 열어주는 오지의 풍경. 겨울이면 더욱 고요해지고, 여름이면 싱그럽게 살아나는 이 계곡은 사계절 모두 다른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저 자연 속에 머무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곳, 그래서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여행이 시작된 곳이었다.
1. 수비계곡 겨울이 숨쉬는 곳
수비계곡은 영양군 수비면에 위치한 비교적 잘 알려지지 않은 숨어 있는 보석 같은 곳이다. 솔직히 이름도 처음 들어봤다. 지도를 보면서도 반신반의했다. 지도상으로는 그저 얇은 실선처럼 보이는 물줄기였으니까. 막상 그곳에 도착하니 예상과는 전혀 달랐다. 입이 벌어졌다. 계곡은 생각보다 길게 뻗어 있었고, 양쪽으로는 수려한 산맥들이 굽이진 채 병풍처럼 펼쳐져 있었다. 맑고 얕은 계곡물이 흐르며 바위 위에 닿을 때마다 물방울이 흩어졌다. 그 소리가 너무나 또렷했다. 그날따라 바람이 거의 없어서인지 계곡물 흐르는 소리가 더욱 또렷했다. 귀를 기울이니 물소리가 여러 가지였다. 빠르게 흐르는 소리, 천천히 흐르는 소리, 바위에 부딪히는 소리. 다 달랐다. 중간중간 얼어붙은 물줄기는 한 장의 풍경화를 만들었다. 손을 대보니 얼음이 아직 녹지 않은 채 단단했다. 차갑고 매끈했다. 고요한 숲의 공기 속에서 나는 스스로 호흡이 느려짐을 느꼈다. 의식적으로 천천히 쉰 게 아니라 저절로 그렇게 됐다. 산림청에 따르면 수비계곡이 흐르는 이 지역은 청정 1등급 수질을 자랑하는 곳이라고 한다. 실제로 계곡 물은 그야말로 유리처럼 맑았다. 물속 자갈 하나하나가 선명하게 보였다. 손으로 물을 떠서 얼굴에 묻혀봤다. 너무 차가워서 깜짝 놀랐지만 기분이 좋았다. 살아있다는 느낌. 이 물줄기를 따라 올라가면 해발 1,200m가 넘는 백암산과 팔공산 자락으로 이어진다고 했다. 그러니 이 계곡은 그 산맥의 숨결을 그대로 품고 있는 셈이다. 나무 사이로 햇살이 내려앉을 때 물결 위에 빛이 부서졌다. 그런 찰나의 순간은 말이 필요 없는 위로였다. 나는 이따금 멈춰 서서 가만히 서 있었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 마음속 무게들이 눈처럼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이 길을 걷다 보면 사람의 흔적이 거의 없다는 사실에 놀라게 된다. 캠핑장이나 인위적인 구조물이 거의 없다. 여름 성수기 때 소수의 야영객이 방문하긴 하지만, 대부분은 지역 주민이나 몇몇 트레킹 애호가들이 이곳을 찾는다고 했다. 겨울에는 더더욱 찾는 이가 드물다고. 실제로 두 시간 넘게 걸었는데 사람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이 계곡을 나만의 풍경으로 누릴 수 있었다. 발길 닿는 곳마다 길이 되고, 계곡 옆 바위에 앉아 물소리를 듣는 그 시간이 하루 중 가장 충만했다. 혼자인데 외롭지 않았다. 오히려 혼자여서 좋았다. 시간의 흐름이 느리게 하는 이 계곡은 치유의 언어로 가득하다. 걷는 동안 무리해서 속도를 낼 필요도 없다. 잠깐 멈추고, 주변을 둘러보고, 숨을 깊이 들이쉬는 것만으로 충분한 여정이었다.
2. 수비계곡 주변 가볼 만한 곳
수비계곡을 내려온 뒤 주변으로 발걸음을 옮기면 마주하는 풍경 역시 만만치 않다. 이 지역은 영양군 전체가 생태경관 보전지역으로 지정돼 있을 만큼 훼손되지 않은 자연을 고스란히 품고 있다고 했다. 그 말이 과장이 아니었다. 어디를 가도 장관이었다. 그중에서도 꼭 추천하고 싶은 첫 번째 장소는 일월산 자락에 위치한 검마산 자연휴양림이다. 수비계곡에서 차로 30분 거리였다. 멀지 않았다. 숲 해설 프로그램이나 조용한 산림욕을 원한다면 더할 나위 없는 공간이라고 해서 찾아갔다.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설경이 장관을 이룬다고 했는데, 내가 간 날은 눈이 살짝 쌓여 있었다. 숲 속의 오두막 숙소와 나무 계단이 어우러진 풍경은 마치 어릴 적 읽었던 동화책 속 그림 같았다. 특히 겨울철이라 그런지 흰 눈이 가지마다 내려앉은 산책로를 따라 걷다 보니 마음까지 깨끗해지는 느낌이었다. 쉼이 목적이라면 꼭 들러야 할 장소다. 이어서 찾은 곳은 영양 반딧불이 천문대였다. 사실 이곳은 여름철에 더 잘 알려진 장소라고 들었다. 하지만 겨울철에도 맑은 날 밤에는 별빛을 볼 수 있는 작은 천문대가 운영된다고 해서 예약하고 갔다. 사전 예약이 필요하긴 했지만 어렵지 않았다. 도심에서는 보기 힘든 별들을 육안으로 볼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였다. 특히 이 지역은 빛공해 제로 구역으로 지정돼 있어서 별이 쏟아지는 밤하늘을 체험할 수 있는 장소로도 유명하다고 했다. 실제로 봤는데 정말 쏟아지는 것 같았다. 별똥별도 두 개나 봤다. 소원을 빌었다. 무슨 소원이었는지는 비밀이다. 또 하나 추천하고 싶은 장소는 두들마을이다. 수비면에서 멀지 않은 이 마을은 도예촌으로, 한국 전통 가마방식인 옹기 가마가 지금도 살아 있는 곳이라고 했다. 도자기 체험도 가능하다고 해서 해봤다. 흙을 만지는 게 이렇게 재밌는 줄 몰랐다. 물레를 돌리며 그릇을 만드는데 계속 찌그러졌다. 웃음이 났다. 마을 곳곳에 전시된 토기 조형물이 여행의 감성에 색다른 재미를 더했다. 잠시 둘러보기만 해도 충분히 영감을 받을 수 있는 공간이었다.
3. 주변 맛집
여행에서 식사는 감정의 마지막 퍼즐이다. 특히 한적한 자연을 걸은 뒤의 식사는 그 어느 때보다 깊게 다가온다. 영양에는 눈에 띄는 대형 맛집은 없지만 소박하면서도 진심이 담긴 식당들이 곳곳에 숨어 있다. 그중 내가 방문한 첫 번째 장소는 수비면에 위치한 산촌식당이었다. 이름부터 믿음직스러웠다. 메뉴는 단출했다. 청국장, 더덕구이, 산채비빔밥. 하지만 그 정갈함이 오히려 믿음을 줬다. 이것저것 많으면 오히려 안 믿긴다. 여기는 딱 잘하는 것만 한다는 느낌이었다. 추운 날씨에 몸을 따끈하게 데워줄 청국장을 주문했다. 뚝배기가 나왔는데 김이 모락모락 났다. 뚜껑을 열자 특유의 향이 확 퍼졌다. 구수했다. 콩이 알알이 살아 있었고, 진한 국물은 하루의 피로를 부드럽게 풀어줬다. 한 숟가락 떠서 입에 넣으니 온몸이 따뜻해졌다. 반찬은 계절마다 바뀐다고 했는데, 내가 갔을 땐 말린 고사리와 참나물, 장아찌가 정갈하게 차려져 있었다. 맛있다는 표현보다 마음이 풀린다는 말이 더 어울리는 식사였다. 밥 한 공기를 완전히 비웠다. 배부르고 행복했다. 점심을 마치고 들른 곳은 영양읍 인근의 느린 커피라는 작은 카페였다. 이름이 마음에 들었다. 느린 게 좋았다. 통창 너머로 산이 보이는 구조가 인상적이었다. 내부는 조용했고, 나무로 만든 가구가 주는 아늑함이 따뜻했다. 나는 시나몬 라떼 한 잔을 주문했다. 매캐한 향 뒤에 퍼지는 부드러움이 좋았다. 단맛도 적당했다. 창가 자리에 앉아 커피를 마시는 동안 나는 수비계곡을 다시 떠올렸다. 계곡물의 흐름, 산 그림자의 곡선, 바람의 숨결. 모든 장면이 파노라마처럼 머릿속을 스쳐갔다. 그리고 그 모든 순간을 조용히 감싸는 한 잔의 여유가 이 공간에서 완성됐다. 커피를 다 마시고도 한참을 더 앉아 있었다. 가고 싶지 않았다. 여행의 마지막 저녁은 영양 전통한우를 취급하는 대나무숯불이라는 식당에서 마무리했다. 지역 주민이 추천해 준 곳이었다. 고기는 부드럽고 육즙이 가득했다. 와 진짜 맛있다는 말이 저절로 나왔다. 숯향이 깊게 밴 불판 위에서 지글지글 구워지는 고기를 보는 것만으로도 힐링이었다. 막걸리 한 잔을 곁들이며 나눈 지역 주민과의 짧은 대화도 기억에 남는다. "영양은 조용해서 좋아요. 다들 빨리 달리려 하는데, 여긴 그냥 천천히 가도 괜찮은 데라서."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나도 나지막이 웃었다. 정말 그랬다. 여기는 천천히 가도 괜찮은 곳이었다. 아니, 천천히 가야 하는 곳이었다.
여행을 마치며
수비계곡을 처음 걸었을 때 나는 시간이 느려지는 걸 느꼈다. 발걸음 하나에 머물고, 숨 한 번에 깊어졌다. 그것이 이곳의 진짜 매력이었다. 뭔가를 보려고 애쓰지 않아도, 애써 말을 하지 않아도, 그냥 거기에 있는 것만으로 충분한 순간들이 이어졌다. 이런 게 진짜 여행이구나 싶었다. 계곡의 고요함은 내 마음을 비추는 거울 같았다. 너무 번잡한 세상 속에서 조금은 닳아있던 감각들이 이 계곡과 산, 숲, 맛있는 음식과 사람들 사이에서 조용히 회복됐다. 당신도 만약 조금은 천천히, 조용히, 자신을 돌아보고 싶은 날이 필요하다면. 이곳 영양 수비계곡으로 1박 2일 겨울여행을 적극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