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겨울의 정적이 가장 아름답게 어울리는 장소가 있다. 경상북도 청도군에 자리한 운문사가 바로 그곳이다. 차갑게 가라앉은 공기 속에서 천천히 산사를 거닐며 복잡했던 마음을 정돈하고, 운문호 드라이브로 시원한 풍경을 만끽한 뒤, 인근 자연휴양림이나 체험 공간까지 묶어 하루 코스로 완벽하다. 색채가 단순해진 계절이기에 오히려 사찰 본연의 선과 구조, 분위기가 더욱 또렷하게 다가온다. 조용히 걷기에 최적화된 이 공간은 소란스러운 일상에서 벗어나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싶은 모든 이에게 확실한 곳이다.
1. 겨울 운문사 산사 산책
운문사 주차장에 도착하여 차 문을 여는 순간 뺨을 스치는 바람이 유난히 차가웠지만 나쁘지 않았다. 도시의 탁한 냉기와는 차원이 다른, 깨끗하고 청명한 한기였다. 장갑과 넥워머를 단단히 챙겨 와서 다행이었다. 겨울 운문사 체감온도는 상당히 낮았다. 바람이 산 아래에서 계곡을 타고 올라와 사찰을 휘감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추위가 오히려 정신을 번쩍 나게 했다. 온몸의 감각이 깨어나는 느낌이었다. 주차장에서 일주문까지는 완만한 오르막길이 이어진다. 주변에는 키 큰 나무들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었고, 그 사이로 겨울 햇살이 가늘게 스며들었다. 일주문을 지나자 본격적으로 경내가 펼쳐졌다. 겨울이라 단풍도 없고 화려한 꽃도 없지만, 그래서 더 좋았다. 색이 단순해지니 사찰 건물의 곡선과 직선, 기와의 결, 단청의 무늬가 훨씬 더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여름이나 가을에는 주변 풍경에 묻혀 보이지 않던 것들이 겨울엔 고스란히 드러났다. 천천히 걸으며 경내를 둘러봤다. 대웅보전 앞마당은 넓고 평평했다. 눈이 살짝 내린 흔적이 있었지만 이미 녹아서 돌바닥이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보전 앞에 서서 건물을 올려다봤다. 기와가 층층이 쌓인 지붕 선이 하늘과 맞닿아 있었다. 처마 끝이 살짝 치켜 올라간 곡선이 우아했다. 겨울이 아니었다면 놓쳤을 것들이다. 단청도 마찬가지였다. 붉은색과 청록색, 노란색이 조화롭게 칠해진 문살과 기둥을 자세히 들여다봤다.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페인트가 일부 벗겨지고 색이 바랜 부분도 있었지만, 그것이 오히려 정겹게 느껴졌다. 건물 뒤편으로 햇살이 스며들며 만들어낸 명암 대비가 극적이었다. 빛의 각도가 낮아지니 사찰 전체가 입체적으로 보였다. 평면적이던 건물들이 살아 움직이는 듯했다. 나는 한 곳에 오래 서서 그 장면을 카메라에 담았다. 하지만 사진보다 더 중요한 건 눈으로 직접 보고 느끼는 것이었다. 카메라가 담을 수 없는 공기의 질감, 바람의 온도, 침묵의 무게. 그런 것들이 이 공간을 특별하게 만들었다. 경내를 천천히 한 바퀴 돌았다. 전각 앞에 잠시 멈춰 서서 건물을 바라보고, 다시 걸었다. 평일 오후라 그런지 방문객이 거의 없었다. 덕분에 경내를 거의 혼자 누릴 수 있었다. 발소리만 들렸다. 돌바닥 위를 걷는 내 발걸음 소리가 고요 속에서 또렷하게 울렸다. 그 소리마저 명상처럼 느껴졌다. 내려오는 길에는 기와와 문살의 디테일을 집중적으로 찍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장인의 손길이 느껴졌다.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만들어진 흔적들. 그것들을 발견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운문사는 화려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소박함 속에 깊은 아름다움이 숨어 있었다.
2. 운문호와 주변 명소
운문사를 나와 차를 몰았다. 다음 목적지는 운문호였다. 사찰에서 차로 10분도 채 걸리지 않는 거리였다. 운문호로 가는 길은 평화로운 드라이브 코스였다. 도로 양옆으로 나무들이 늘어서 있고, 중간중간 계곡이 보였다. 창문을 조금 내리자 차가운 바람이 들어왔다. 상쾌했다. 운문호에 도착하니 탁 트인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호수가 넓게 펼쳐져 있었고, 물빛이 짙은 청록색이었다. 겨울이라 수위가 낮았지만 그래서 더 고즈넉했다. 호숫가에 차를 세우고 잠시 내렸다. 바람이 세게 불었다. 호수 표면에 잔물결이 일었다. 저 멀리 산들이 호수를 둘러싸고 있었다. 그 풍경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넓어지는 기분이었다. 답답했던 가슴이 뚫리는 느낌. 짧은 드라이브만으로도 충분히 리프레시됐다. 운문호를 둘러본 뒤 운문산자연휴양림으로 향했다. 휴양림 입구에 들어서자 소나무 숲이 펼쳐졌다. 공기가 한층 더 맑아진 게 느껴졌다. 피톤치드 냄새가 진했다. 나무 데크가 깔려 있는 구간도 있고, 자연 그대로의 흙길도 있었다. 두 종류의 길이 적절히 섞여 있어서 지루하지 않았다. 한 시간 정도 걸었더니 추운 날씨에도 땀이 살짝 맺혀 몸이 따뜻해졌다. 추웠던 몸이 풀리는 느낌이 좋았다. 휴양림은 혼자 걷기에도, 가족이나 연인과 함께 걷기에도 좋은 곳이었다. 시간 여유가 있다면 청도신화랑풍류마을도 추천한다. 운문면 운문로 2455에 위치한 이곳은 화랑정신을 주제로 한 복합 관광지다. 체험 시설과 숙박 시설이 함께 갖춰져 있어서 1박으로도 가능하다. 카라반과 캠핑장도 있어서 겨울 캠핑을 즐기는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다고 한다. 나는 시간이 여유가 없어 이번엔 들르지 못했지만 다음에 꼭 방문해 볼 계획이다. 공암풍벽도 빼놓을 수 없는 곳이다. 청도 8경 중 하나로 꼽히는 이곳은 운문호 물길 옆에 자리한 약 30미터 높이의 절벽 지형이다. 전망 포인트로 유명한데, 특히 날씨 좋은 날 찾으면 운문호와 주변 산세가 한눈에 들어온다. 실내 코스를 원한다면 영담한지미술관도 좋은 여행지다. 겨울엔 야외 활동이 제한적이라 실내 코스가 귀한데, 운문사 근처에 전문 박물관이 있다는 게 반가웠다. 한지를 주제로 한 전시가 열리고 있었고, 작품 수준도 꽤 높았다. 전통과 현대가 조화롭게 어우러진 공간이었다. 따뜻한 실내에서 예술 작품을 감상하며 여유를 즐기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추천 동선을 정리하자면 이렇다. 운문사 산책 1시간에서 1시간 반, 운문호 드라이브 30분 이상, 그리고 휴양림이나 풍류마을 중 한 곳을 선택해 1시간에서 2시간 정도 할애하면 된다. 반나절이면 충분히 알차게 돌아볼 수 있는 코스다.
3. 운문사 근처 맛집과 카페
여행의 완성은 역시 음식이다. 특히 겨울엔 따뜻한 국물 요리가 필수다. 운문사 인근에는 로컬 맛집들이 여럿 있다. 내가 들른 곳은 울산식당이었다. 운문사에서 가까운 한식 전문점으로, 현지인들도 자주 찾는다고 했다. 메뉴판을 보니 된장찌개, 청국장, 제육볶음 같은 전형적인 한식 메뉴들이 있었다. 나는 청국장을 주문했다. 주문 후 5분도 안 돼서 음식이 나왔다. 뚝배기 뚜껑을 열자 구수한 냄새가 확 퍼졌다. 한 숟가락 떠서 입에 넣으니 진하고 깊은 맛이었다. 두부도 듬뿍 들어 있고, 야채도 신선했다. 밥 한 공기를 뚝딱 비웠다. 차가운 공기 속에서 걷고 또 걸었던 몸이 따뜻하게 녹아내렸다. 반찬도 깔끔했다. 김치, 나물, 멸치볶음 등 기본 반찬들이 정갈하게 나왔다. 과하지 않고 딱 적당했다. 운문면 일대에는 다른 맛집 후보들도 많다. 마당집, 산유화, 쌍두봉가든, 토담 같은 식당들이 현지에서 입소문 난 곳들이다. 나는 이번엔 울산식당만 가봤지만, 다음엔 다른 곳들도 시도해 볼 생각이다. 특히 겨울철엔 탕이나 백숙 같은 국물 요리가 만족도가 높다. 체감온도가 낮은 만큼, 몸을 따뜻하게 데워주는 음식이 필요하다. 삼계탕이나 오리백숙도 괜찮을 것 같다. 한 가지 팁을 주자면, 주말이나 성수기엔 대기 시간이 있을 수 있다. 특히 점심시간에는 현지인들도 많이 몰린다. 그래서 운문사를 먼저 보고 식사하는 게 기다림 없이 지치지 않는다. 사찰 관람을 아침이나 이른 오후에 하고, 점심은 조금 늦게 먹는 식으로 시간을 조정하면 대기 없이 편하게 식사할 수 있다. 또 겨울엔 일찍 해가 진다. 오후 4시만 돼도 어두워지기 시작하니, 일정을 오전이나 이른 오후에 집중하는 게 좋다. 카페도 몇 군데 있었다. 운문면 중심가 쪽에 작은 카페들이 있는데, 내가 들른 곳은 창가 자리가 좋은 조용한 카페였다.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분위기가 아주 좋았다. 통유리창 너머로 산이 보였다.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시켜서 천천히 마셨다. 여행의 피로가 커피 한 잔으로 풀리는 기분이었다. 음악도 은은하게 흘러나왔다. 재즈였던 것 같다. 그곳에서 한 시간 가까이 앉아 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창밖을 바라봤다. 바쁘게 움직이지 않아도 되는 시간. 그런 여유가 여행의 진짜 가치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행을 마치며
겨울 여행은 춥고, 풍경도 단조로워서 꺼리게 된다. 하지만 청도 운문사는 추위가 오히려 감각을 예리하게 만들었고, 단순해진 색채는 본질을 더 선명하게 드러냈다. 차가운 공기 속에서 천천히 걸으며, 천년 사찰의 고요에 몸을 맡기고, 운문호의 탁 트인 풍경으로 마음을 비우고, 따뜻한 국물로 몸을 녹인 하루. 그 모든 순간이 조용하지만 강렬하게 내 안에 각인됐다. 운문사는 소박함 속에 깊은 울림이 있었다. 겨울이라 색이 빠진 풍경 속에서 건물의 선과 곡선이 더욱 또렷하게 보였다. 조용히 걷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주변 명소들도 억지로 꾸며놓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매력을 간직하고 있었다. 운문호의 고요한 물빛, 휴양림의 맑은 공기, 공암풍벽의 웅장함. 모든 게 과하지 않게, 딱 적당한 선에서 조화를 이뤘다. 만약 당신이 진짜 고요를 찾고 있다면, 망설이지 말고 이곳으로 향하라. 그 고요 속에서 당신도 분명 당신만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