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을이 깊어질수록 마음은 조용한 곳을 찾는다. 지리산 자락 천년 고찰 실상사의 고요함, 지리산 둘레길과 광한루원의 가을 풍경, 남원 추어탕의 구수한 맛이 완벽한 하루를 만들었다.
1. 실상사
남원 시내에서 차로 20분 남짓 달리자 도로 너머로 보이는 산 풍경이 확연히 달라졌다. 지리산 자락으로 접어들수록 논과 밭, 낮은 산들이 이어졌고 그 끝에 실상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실상사는 통일신라 흥덕왕 때인 828년에 창건된 사찰로, 한국 선종의 발상지 중 하나로 알려진 곳이었다. 이름처럼 있는 그대로의 진리를 추구했던 사찰답게, 첫인상부터 소박하고 단정했다. 일주문을 지나 경내로 들어서자 은행나무와 느티나무가 담담한 가을빛을 품고 서 있었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와 멀리서 들려오는 목탁 소리가 공간을 채웠다. 실상사는 규모가 크지 않았지만, 삼층석탑과 석등, 보물로 지정된 철불좌상 등 유서 깊은 문화재들이 곳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인위적으로 꾸민 느낌이 거의 없어, 사찰 전체가 하나의 자연 풍경처럼 느껴졌다. 대웅전 앞마당에 서서 잠시 가만히 서 있었다. 관광객이 많지 않아 더 좋았다. 사진을 찍기보다는 그냥 바라보고, 숨을 고르기에 적당한 공간이었다. 가을 햇살이 기와 위로 부드럽게 내려앉고, 마당에 떨어진 낙엽이 발밑에서 바스락거렸다. 실상사는 무언가를 보여주기보다, 조용히 머물게 하는 힘이 있는 절이었다. 삼층석탑 주변을 천천히 걸으며 세월의 흔적을 살펴보았다. 탑의 돌 하나하나에 천년의 시간이 새겨져 있는 듯했다. 석탑 옆에는 보물로 지정된 석등이 서 있었는데, 그 형태가 아름다우면서도 간결했다. 철불좌상이 모셔진 전각으로 들어갔다. 불상은 철로 만들어졌음에도 온화한 표정을 짓고 있었고, 그 앞에 앉아 한참을 묵상에 잠겼다. 마음속 잡념들이 하나씩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경내를 한 바퀴 돌고 나오는 길에 작은 연못을 발견했다. 연못 수면에 하늘과 나무가 비쳐 있었고, 가을 분위기가 그대로 담겨 있었다. 연못가 벤치에 앉아 한참을 쉬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수면에 잔물결이 일었고, 그 모습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평온했다. 절 뒤편으로는 작은 산책로가 이어져 있어 그곳도 걸어보았다. 숲길은 조용했고, 낙엽이 쌓인 길을 걷는 소리만 들렸다. 산책로 중간에 약수터가 있어서 시원한 약수를 들이켰다. 몸속 답답함이 뚫리는 기분이었다.
2. 실상사 주변 지리산 둘레길
실상사를 나와 바로 돌아가기엔 아쉬워 주변을 조금 더 둘러보기로 했다. 가장 먼저 들른 곳은 지리산 둘레길 1코스 중 주천과 운봉을 잇는 구간 일부였다. 실상사 인근을 지나는 이 길은 험하지 않고 완만해 가볍게 걷기 좋았다. 논과 밭 사이로 난 흙길을 따라 걷다 보니, 지리산 능선이 멀리 병풍처럼 펼쳐졌다. 가을 수확을 앞둔 들판의 색감이 무척 따뜻했다. 둘레길을 걷는 동안 만난 사람은 몇 되지 않았고, 대부분 현지 주민들이었다. 인사를 나누며 지나갔고, 그들의 친절한 미소가 기억에 남았다. 길 옆으로는 코스모스가 피어 있었고, 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리는 모습이 나를 유혹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중간에 정자가 있어 잠시 쉬었다. 정자에서 바라본 들판 풍경이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이후 차를 타고 광한루원으로 이동했다. 남원 하면 빠질 수 없는 곳이었지만, 가을의 광한루원은 또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연못 위에 떨어진 단풍잎, 은행나무 아래 노랗게 쌓인 잎들, 그리고 한가롭게 산책하는 사람들까지 모두 풍경의 일부처럼 어우러졌다. 춘향과 몽룡의 이야기가 깃든 공간이었지만, 이날만큼은 그 서사보다도 계절의 분위기가 더 크게 다가왔다. 오작교를 건너며 연못을 내려다보았다. 물속에는 잉어들이 유유히 헤엄치고 있었고, 연못 가장자리에는 단풍이 수면에 반영되어 있었다. 광한루 누각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았다. 원림 전체가 한눈에 들어왔고, 가을빛으로 물든 정원이 아름다웠다. 누각 안에는 춘향과 몽룡 관련 전시물도 있어 잠시 구경했다. 시간이 조금 남아 요천변 산책로도 걸었다. 강을 따라 조성된 산책길은 조용했고, 물 위로 반사되는 가을 하늘이 인상적이었다. 실상사의 고요함에서 시작해, 들판과 강으로 이어지는 동선이 자연스러웠다. 남원은 이렇게 서두르지 않아도 하루가 꽉 차는 도시였다. 강변을 따라 걷다 보니 낚시하는 사람들도 보였고, 자전거를 타는 가족도 지나갔다. 평화로운 일상의 풍경이었다.
3. 남원의 소박한 깊은 한 끼
점심도 간단히 먹고 가을바람을 맞으며 걷다 보니 자연스럽게 배가 고파졌다. 조금 이른 저녁으로 남원 시내에 있는 추어탕 거리 중 한 곳을 선택했다. 그중에서도 오래된 집으로 알려진 새집추어탕에 들렀다. 남원은 추어탕의 본고장답게, 이 음식만으로도 여행의 이유가 됐다. 뚝배기에 담겨 나온 추어탕은 진하고 구수했다. 미꾸라지를 통째로 갈아 넣어 국물이 걸쭉했고, 산초 향이 은은하게 퍼졌다. 한 숟갈 떠먹자마자 몸이 따뜻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가을에 먹는 추어탕은 계절과 참 잘 어울렸다. 반찬으로 나온 김치와 깍두기도 과하지 않고 정갈해, 국물 맛을 해치지 않았다. 추어탕에 밥을 말아먹으니 속이 든든해졌다. 국물은 진했지만 느끼하지 않았고, 미꾸라지 특유의 고소한 맛이 일품이었다. 산초가루를 추가로 넣어 먹으니 더욱 개운했다. 식당 주인 할머니께서 반찬을 더 주시며 많이 먹으라고 하셨다. 따뜻한 인심이 느껴져 기분이 좋았다. 주변 테이블을 보니 현지 주민들도 많이 찾는 집이었다. 그만큼 맛이 검증된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식사 후에는 근처 카페에서 커피 한 잔으로 마무리했다. 한옥을 개조한 작은 카페였는데, 창밖으로 남원의 골목과 가을 하늘이 보였다. 뜨거운 커피를 마시며 오늘 걸었던 실상사의 마당과 둘레길 풍경을 떠올렸다. 화려한 미식은 아니었지만, 이 지역의 삶이 그대로 담긴 한 끼였다. 카페 내부는 아늑하게 꾸며져 있었고, 벽에는 남원 관련 사진들이 걸려 있었다. 카페 주인분과 잠시 이야기를 나눴다. 남원의 숨은 명소에 대해 추천도 받았고, 다음에 올 때는 그곳들도 가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커피와 함께 나온 수제 쿠키도 맛있었다. 카페에서 나오니 오후 햇살이 따사로웠다. 남원 시내를 천천히 걸으며 여행의 여운을 음미했다. 작은 골목길을 지나다 전통시장도 발견해서 들어가 보았다. 시장 안은 활기찼고, 각종 농산물과 먹거리가 가득했다. 남원의 일상이 생생하게 느껴지는 공간이었다.
여행을 마치며
남원 실상사에서의 하루는 유난히 조용했다. 하지만 그 조용함 덕분에 오히려 많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천년을 버텨온 절의 마당, 지리산 자락의 들판, 강변을 스치는 바람, 그리고 추어탕 한 그릇의 온기까지 남원의 가을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실상사 대웅전 마당에 서서 느낀 고요함, 둘레길을 걸으며 만난 들판의 따뜻한 색감, 광한루원 연못에 비친 단풍의 반영, 요천변을 거닐며 마주한 평화로운 풍경. 이 모든 순간이 모여 하나의 완벽한 가을 여행을 만들었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도 한동안 여운이 가시지 않았다. 실상사의 고요함이 마음속에 남아 있었고, 추어탕의 구수한 맛이 입안에 맴돌았다. 만약 붐비는 단풍 명소가 아닌, 마음이 쉬어가는 가을 여행을 원한다면 실상사를 적극 추천해 본다. 지리산의 웅장함보다 들판의 소박함이 그리운 날. 그런 날엔 남원 실상사가 답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