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라북도 무주는 여름의 반딧불이와 겨울의 스키장으로 많이 알려져 있지만, 그 사이의 계절 속에서도 조용히 빛나는 공간들이 있다. 대표적으로 머루와인동굴은 버려진 폐터널을 새롭게 탄생시킨 이색적인 장소이다. 동굴 안에는 머루와인을 숙성하는 공간이 펼쳐지고, 그 안에서 마시는 한 잔의 와인은 겨울의 차가움마저 따스하게 만든다. 주변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무주의 진짜 얼굴들이 숨어 있다. 소박한 마을의 풍경, 전통 시장의 생기, 그리고 걷기 좋은 한적한 길까지. 무주는 화려하지 않지만 여행자의 마음을 천천히 사로잡는 매력을 가진 곳이었다.
1. 머루와인동굴 – 겨울에도 따뜻한 그곳, 술이 아닌 분위기에 취하다
전북 무주군 설천면에 위치한 머루와인동굴은 처음 들어보면 생소할 수도 있지만, 막상 찾아가 보면 왜 ‘무주의 숨은 명소’라 불리는지 단번에 알 수 있다. 원래 이곳은 70년대 철도 터널로 쓰이다가 폐쇄된 공간이었다. 하지만 2010년부터 무주군과 지역 주민의 관심으로 와인 숙성 동굴로 재탄생했다. 길이 약 350미터, 내부 온도는 연중 13~15도로 유지되어 머루와인을 저장·숙성시키기에 최적화되어 있다. 입구에 도착했을 때는 차가운 바람이 뺨을 스치며 다소 을씨년스러운 분위기였지만, 동굴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모든 상상이 바뀌었다. 부드럽게 조명된 붉은 조명과 와인통들이 놓인 모습은 이국적인 감성을 자극한다. 머루로 만든 와인은 일반적인 포도 와인보다 달콤하면서도 은은한 산미가 살아있는데, 시음장에서 직접 맛보는 순간 그 풍미에 자연스럽게 미소가 번진다. 직원분들은 와인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주시고, 머루가 무주 지역의 대표 특산물이라는 이야기까지 덧붙여지면서 그곳에 대한 애정도 느껴졌다. 무엇보다 좋은 점은, 이곳이 단순한 와인 판매처가 아니라 하나의 문화 공간이라는 점이다. 벽면에는 와인에 관련된 일러스트와 지역 예술가들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었고, 중간에는 작은 공연도 가능한 무대 공간도 마련되어 있었다. 나는 그곳에 한참 앉아있었다. 단순한 구경이 아니라 머물고 싶은 공간이란 느낌을 주는 장소는 흔치 않다. 동굴 안을 다 둘러보고 나오면, 입구에 마련된 판매 코너에서 시음한 와인을 직접 구입할 수도 있다. 외부의 찬 기운과는 달리, 동굴 속은 아늑함이 가득했다. 그것은 온도 때문만이 아니라, 공간 자체가 주는 정서 때문이었던 것 같다. 복잡한 도시에서는 쉽게 느낄 수 없는 안정감. 그건 아마 ‘버려진 곳을 살려낸’ 이곳 사람들의 의지가 곳곳에 배어 있기 때문 아닐까. 머루와인동굴은 분명히 술을 테마로 한 공간이지만, 그 이상으로 기억될 풍경과 감정이 담겨 있는 곳이었다.
2. 무주읍 전통시장과 향토식당 – 소박함에서 찾은 진짜 맛
머루와인동굴에서 차로 20분 남짓 달리면 무주읍내에 도착한다. 이곳에는 무주 전통시장이 있다. 요즘은 여행지에서 현지 시장을 일부러 찾아다니는 사람들이 많아졌는데, 나 역시 그런 그중 한 명이다. 무주의 시장은 규모가 그리 크진 않지만, 그 안에서만 느낄 수 있는 따뜻함이 있다. 일단 도착하자마자 반기는 건, 아침 장을 보러 나온 어르신들과 상인들이 나누는 정겨운 인사들이다. 시장을 들어서는 좌우로 다양한 물건과 먹거리 파는 가게들이 줄지어 있는데, 특이하게도 머루청, 머루잼, 각종 머루 가공품들을 파는 가게가 많다. 동굴에서 마신 와인의 원료가 이런 모습이었구나 싶어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그 외에도 제철 채소, 직접 만든 장류, 고춧가루, 그리고 옥수수 뻥튀기 튀밥이 눈길을 끈다. 현대적인 감각보다는 옛날 시장의 느낌이 살아 있어서, 도심 시장에서는 쉽게 보기 어려운 정취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시장 안쪽에는 오래된 국밥집이 한 곳 있는데, 지역 주민들에게 물어물어 찾아갔다. 메기탕과 올갱이국, 청국장 같은 향토 음식이 중심인데, 나는 그중에서도 청국장을 선택했다. 콩의 구수함이 진하게 퍼지면서도 짜지 않고 부드럽게 넘어가는 맛이 일품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나와 골목길을 따라 걷다 보니, 오래된 한약방, 문구점, 그리고 벽화로 꾸며진 마을 담장이 이어진다. 이 동네 사람들의 삶이 오롯이 묻어난 거리다. 여행이라는 게 꼭 새로운 것만 보는 게 아니라, 평범한 하루 속에 스며든다는 걸 다시 느꼈다. 무주읍 시장은 화려하지 않지만, 그 안에 진짜 여행의 온기가 담겨 있었다.
3. 무풍면 외평마을 산책 –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마을의 겨울
많은 이들이 무주 하면 덕유산이나 스키장만 떠올리지만, 사실 무풍면에는 정말 아름다운 마을이 숨어 있다. 그중에서도 ‘외평마을’은 아직 잘 알려지지 않은 조용한 곳이다. 머루와인동굴에서 30분 정도 차를 타고 이동하면 도착할 수 있는데, 계곡과 숲, 논밭이 어우러진 그 풍경이 처음엔 너무 평범해 보여 수 있다. 하지만 조금만 걷다 보면, 그 안에 숨어 있는 정취가 남다르다는 걸 느끼게 된다. 마을 초입에는 오래된 느티나무 몇 그루가 마을 지킴이로 버티고 서 있고, 옛 우물터와 고택 몇 채가 복원되어 있어 시간이 멈춘 듯한 느낌을 준다. 초겨울 들판은 대부분 비어 있지만, 하얗게 서리가 내린 논두렁을 걷다 보면 세상의 소음이 차단된 듯한 고요함이 찾아온다. 마을 중심에는 작은 연못과 정자가 있는데, 그 옆 벤치에 앉아 있자니 바람소리, 낙엽 밟는 소리, 멀리서 들려오는 개 짖는 소리까지 모든 소리가 음악처럼 들렸다. 주민분들이 운영하는 작은 카페가 하나 있는데, 직접 주민이 만든 판매하는 쌍화차 한 잔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불을 지핀 화덕 옆 테이블에서, 사장님이 직접 내려준 차와 함께 나눈 짧은 대화가 긴 여운을 남겼다. “겨울엔 손님이 많이 없지만, 그래서 더 좋죠. 조용하고, 그냥 여기 시간대로 살아요.” 그 말이 이 마을을 가장 잘 설명해 주는 듯하다. 외평마을은 관광지라기보다는 ‘살고 싶은 마을’이었다. 대단한 볼거리가 있는 건 아니었지만, 마음이 저절로 끌리는 마법 같은 풍경이 있다. 계절마다 다른 옷을 입겠지만, 겨울의 외평마을은 유독 순수하고 너그러웠다. 마치 말하지 않아도 다 이해해 주는 친구처럼, 나는 이곳을 나서며 다시 오고 싶다는 마음을 속으로 몇 번이나 되뇌었다.
맺음말
무주에서의 하루는 빨리 흘러가지 않았다. 생각보다 더 오래 머물러 있는 듯했고, 더 많이 미소 짓는 시간이었다. 머루와인동굴의 촉촉한 공기, 시장에서 만난 구수한 청국장, 외평마을 정적 속 따뜻한 쌍화차 한 잔. 이 모든 순간들이 내 마음 어딘가를 조용히 감싸주었다. 사람마다 여행에서 기대하고 원하는 건 다르겠지만, 나는 늘 기대보다 많은 것 얻어오는 것 같다. 왜냐하면 그곳에서 나는 진심을 다해 그곳에 빠져 들기 때문인가 싶다. 아니 그곳이 나를 빠져들게 만들기 때문인 거 같다. 무주는 그런 진심을 품은 곳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