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상에서 벗어나 역사와 자연이 공존하는 고창으로 떠났다. 세계유산 고인돌유적지에서 선사시대의 숨결을 느끼고, 운곡습지에서 생태의 고요함에 빠졌으며, 풍천장어로 여행의 끝을 완성했다. 역사·자연·미식이 한 번에 완성되는 완벽한 하루였다.
1. 고창 고인돌유적지
2000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고창군 죽림리 일대에 펼쳐진 고인돌유적지는 약 447기의 고인돌이 밀집해 있으며, 세계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선사시대 거석문화의 심장부였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입구를 통과하는 순간부터 시선을 사로잡는 것은 거대한 덮개돌이었다. 탁자식 고인돌 특유의 형태로, 받침돌 위에 올려진 덮개돌은 수천 년 전 사람들이 어떻게 이토록 무거운 돌을 옮겼는지 의문을 품게 만들었다. 입장료는 무료였고, 연중무휴로 개방되어 있어 언제든 방문할 수 있다는 점이 반가웠다. 유적지 전역에는 도보 관람로와 탐방데크가 잘 정비되어 있어 걷기에 불편함이 전혀 없었다. 첫 번째로 마주한 고인돌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고 한참을 바라보았다. 교과서에서 보던 흑백 사진 속 유물이 아니라, 눈앞에 실재하는 거석이었다. 손을 뻗어 덮개돌 표면을 만져보니 세월의 흔적이 손끝으로 전해졌다. 거칠고 차가운 돌의 질감은 수천 년 전 이곳에 살았던 사람들의 존재를 생생하게 증명하고 있었다. 유적지는 야외 박물관처럼 구성되어 있어 곳곳에 설명 표지판과 QR 가이드가 설치되어 있었다. 스마트폰으로 QR코드를 찍으면 각 고인돌의 역사와 구조, 발굴 과정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특히 인상 깊었던 것은 고인돌 박물관이었다. 전시관 내부에는 고인돌 축조 과정을 재현한 영상과 모형, 그리고 당시 사용되었던 도구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아이들이 직접 체험할 수 있는 공간도 마련되어 있어 가족 단위 방문객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영상을 보며 고인돌이 단순한 무덤이 아니라 공동체의 권력과 신앙, 천문학적 지식까지 담긴 복합적인 문화유산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유적지를 천천히 걸으며 하나하나 고인돌을 살펴보는 데만 두 시간이 훌쩍 지났다. 어떤 고인돌은 받침돌이 네 개나 되었고, 어떤 것은 덮개돌의 무게가 수십 톤에 달했다. 크기와 형태가 제각각이었지만, 모두 한결같이 경외감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유적지 중심부에 위치한 가장 큰 고인돌 앞에서는 누구나 탄성을 내뱉었다. 그 거대함 앞에 서면 인간이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 그러면서도 얼마나 위대한 일을 해낼 수 있는지 동시에 느껴졌다.
2. 운곡습지
고인돌유적지에서 차로 10분 거리에 있는 운곡습지는 전혀 다른 세계였다. 고창군 아산면 운곡리에 위치한 이곳은 국내 유일의 하천형·산지형 복합 습지로, 730여 종의 생물이 서식하는 생태계의 보고였다. 주차장에서 내려 탐방센터로 향하는 길부터 공기가 달랐다. 차갑고 맑은 공기가 폐 깊숙이 스며들었고, 도심에서는 절대 맡을 수 없는 흙과 물, 풀의 향기가 코끝을 자극했다. 탐방센터에서 간단한 안내를 받고 본격적으로 습지 탐방에 나섰다. 입구부터 설치된 데크길은 평탄하고 안전했으며, 유모차나 휠체어도 접근할 수 있을 정도로 배려가 돋보였다. 첫 번째 전망대에 오르자 운곡습지 전체가 한눈에 들어왔다. 넓게 펼쳐진 습지는 물과 육지의 경계가 모호했고, 곳곳에 형성된 작은 연못들은 하늘을 거울처럼 반사하고 있었다. 갈대와 억새가 바람에 일렁이는 모습은 마치 대지가 숨을 쉬는 듯했다. 멀리 산자락이 습지를 감싸고 있어 외부와 완전히 단절된 비밀 정원 같은 느낌이었다. 탐방로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발걸음마다 들리는 소리가 달랐다. 새소리, 물소리, 바람소리, 풀벌레 소리가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하나의 교향곡을 만들었다. 중간중간 설치된 생태 안내판에는 이곳에 서식하는 멸종위기종들이 소개되어 있었다. 수달, 담비, 삵, 황조롱이 같은 동물들이 이곳을 터전으로 삼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비록 직접 목격하지는 못했지만, 그들의 흔적은 곳곳에 남아 있었다. 물가에 찍힌 발자국, 나무에 난 발톱 자국, 땅에 떨어진 깃털 하나하나가 이곳이 살아 있는 생명체로 가득한 공간임을 증명했다. 계절은 초겨울이었지만 습지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낙엽이 쌓인 길을 걷는 소리는 사각사각 경쾌했고, 앙상한 나뭇가지 사이로 보이는 하늘은 더없이 맑았다. 봄과 가을에는 이끼 낀 숲길과 갈대 군락이 장관을 이루고, 여름에는 짙은 녹음 속에서 생태 관찰이 가능하다고 했다. 계절마다 다른 얼굴을 보여주는 운곡습지는 한 번의 방문으로 모든 것을 알 수 없었다. 탐방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나는 운곡습지가 단순한 관광지가 아니라 치유의 공간이라는 것을 확신했다. 복잡한 생각들이 정리되고, 마음이 차분해지며, 몸과 정신이 모두 가벼워지는 경험이었다. 고인돌유적지에서 역사의 무게를 느꼈다면, 운곡습지에서는 생명의 가벼움을 경험했다. 이 두 곳을 함께 방문하는 것은 고창 여행의 완벽한 균형이었다.
3. 고창 풍천장어
고창은 풍천장어로 전국적으로 유명한 곳이었고, 나는 주저 없이 고창읍 선운사길 일대에 자리한 풍천장어마을로 향했다. 입구부터 장어구이집들이 즐비했는데, 어디를 가도 크게 실패할 것 같지 않은 분위기였다. 그중 현지인 추천을 받은 한 식당에 들어섰다. 주문과 동시에 숯불이 피워졌고, 곧이어 신선한 장어가 석쇠 위에 올려졌다. 지글지글 익어가는 장어에서 풍기는 고소한 향은 하루 종일 걸었던 피로를 단번에 날려버렸다. 장어 표면이 바삭하게 익어 황금빛을 띠기 시작하자 주인장이 능숙한 솜씨로 뒤집었다. 첫 입을 베어 물었을 때의 식감은 잊을 수 없었다. 겉은 바삭하고 속은 부드러우며, 장어 특유의 고소함과 단맛이 입안 가득 퍼졌다. 양념장에 살짝 찍어 먹으니 감칠맛이 배가 되었다. 상추에 싸서 마늘, 고추와 함께 먹는 맛도 일품이었다. 장어구이와 함께 나온 장어탕은 깊고 진한 국물 맛이 일품이었다. 하루 종일 야외 활동을 하며 쌓인 피로가 뜨끈한 국물 한 모금에 풀려나갔다. 장어는 단순히 맛있는 음식이 아니라 몸보신에도 좋다고 했다. 실제로 식사를 마친 뒤에는 몸에 활력이 돌았고, 다음 날 일정을 소화할 에너지가 충전되는 느낌이었다. 풍천장어마을은 단순히 장어를 파는 곳이 아니라, 고창의 대표 음식 문화를 경험할 수 있는 곳이었다. 식사 후 소화를 겸해 고창전통시장을 둘러보았다. 시장 안 먹거리 골목에는 국밥집, 전집, 떡집 등 서민 음식을 파는 가게들이 늘어서 있었다. 고창의 음식은 좋은 재료를 제대로 조리해 내놓는 식당들이 많았고, 그래서 어디를 가도 실망할 일이 없었다. 여행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것은 결국 음식이었고, 고창은 그 마무리를 완벽하게 해 주었다.
여행을 마치며
고창에서의 하루는 시간여행이자 생명 순례였으며 미각의 축제였다. 고인돌유적지에서 나는 수천 년 전 선조들의 땀과 신앙을 만났고, 운곡습지에서는 지금 이 순간에도 살아 숨 쉬는 생명의 신비를 목격했으며, 풍천장어와 한우를 통해 이 땅이 품은 풍요로움을 온몸으로 느꼈다. 진짜 역사, 진짜 자연, 진짜 음식이 있었고, 그것들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었다. 고창을 떠나며 나는 생각했다. 무언가를 느끼게 해주는 곳, 고창은 바로 그런 곳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