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을은 단풍을 따라 마음도 물드는 계절이다. 특히 전북 김제는 드넓은 호남평야를 바탕으로 한 농경 문화와 일제강점기의 역사가 깊이 남아있는 곳이다. 옛 김제의 정취와 문화를 느낄 수 있는 대표적인 볼거리와 장소, 바로 천년 역사를 품은 김제 금산사의 고요함, 모악산 자락의 붉은 단풍길, 지평선이 펼쳐진 들녘과 정갈한 향토 밥상이 완벽한 여행 이었다.
1. 금산사 – 천년 고찰과 단풍이 어우러진 산사길
김제시 금산면 모악산 자락에 자리한 금산사는 통일신라 시대 창건된 대표적인 불교 사찰로, 대한민국의 보물과 국보가 가득한 유서 깊은 절이다. 가을이면 사찰 경내는 단풍으로 수놓아지고, 그 붉은색이 오래된 전각의 단청과 어우러져 말 그대로 시간을 걷는 기분이 들었다. 아침 일찍 도착한 금산사 입구에서 입장료를 내고 산문을 지나자 고요한 숲길이 시작됐다. 단풍잎이 부드럽게 떨어지는 참나무길을 걷다 보면, 금산사의 상징인 미륵전이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국보 제62호로 지정된 이 전각은 3층 목조건축물로는 국내 최대 규모로, 가을 햇살을 받아 더욱 장엄하게 빛나고 있었다. 전각 앞에 서니 문득 세속의 번잡함이 멀어지고, 마음이 잠잠해지는 경험을 하게 됐다. 미륵전의 웅장한 기둥과 처마 아래 서면 건축물이 주는 압도적인 존재감에 숨이 멎는 듯했다. 불상을 모신 전각마다 고요히 머물며 명상의 시간을 가졌고, 석등과 탑, 대웅전까지 천천히 걸어보았다. 참배객보다 산책하는 여행자가 많아 분위기가 한결 편안했고, 길가의 단풍나무 아래에 잠시 앉아 가을바람을 맞는 일도 근사했다. 특히 미륵전 주변은 단풍이 유난히 짙어 사진 촬영 명소로도 손꼽히는 곳이었다. 삼삼오오 사진을 찍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도 기와지붕 너머로 드리운 붉은 단풍을 배경으로 가을을 담았다. 대적광전 옆으로 난 작은 돌계단을 올라가니 금산사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전각들의 지붕선이 만들어내는 곡선미와 그 사이사이 붉게 물든 나무들이 조화를 이뤘다. 경내 곳곳에는 오래된 석탑과 석등이 자리하고 있었는데, 세월의 흔적이 묻어나는 돌의 질감이 인상적이었다. 대웅전 앞마당에는 향로에서 피어오르는 연기가 가을 햇살에 반짝였다. 풍경 소리가 바람에 실려 왔고, 그 소리가 마음속 잡념까지 씻어주는 듯했다. 한참을 멍하니 서서 그 소리에 귀 기울였다. 금산사 뒤편으로는 오솔길이 이어져 있었는데, 낙엽이 수북이 쌓인 길을 걷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을을 느낄 수 있었다. 길 옆으로는 작은 계곡물이 흘렀고, 물소리가 산사의 고요함을 더욱 깊게 만들었다.
2. 도솔천, 벽골제 등 김제 평야
금산사 경내를 천천히 둘러본 후에는 뒤편 모악산 자락의 산책길을 가볍게 걸었다. 정상까지 오르지 않더라도 사찰 인근의 도솔천과 연못길만으로도 충분히 가을을 만끽할 수 있었다. 조용한 숲길을 따라 걷다 보니 나무 사이로 햇살이 스며들고, 발밑엔 낙엽이 바스락 소리를 냈다. 여유롭게 걷기 좋은 코스였다. 도솔천 주변은 물소리와 새소리만 들리는 고요한 공간이었다. 물이 맑아서 바닥의 돌멩이까지 훤히 보였고, 물가에는 단풍잎이 떠내려가고 있었다. 연못가에는 벤치가 마련되어 있어 잠시 앉아 쉬었다. 수면에 비친 하늘과 나무들이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가끔 물고기가 수면 위로 뛰어올라 잔물결을 만들었다. 금산사를 벗어나 차로 15분 거리에는 김제 벽골제가 있었다. 삼한시대부터 이어져온 한국 최대의 고대 수리시설로, 지금은 공원처럼 조성되어 걷기 좋았다. 벽골제 역사관을 둘러보며 이 지역이 얼마나 풍요로운 곡창지대였는지를 알게 되었고, 바로 옆 황금들판과 갈대밭 사이를 거닐며 들녘 가을의 정취를 만끽했다. 벽골제 제방 위를 걷는 내내 탁 트인 전망이 시원했다. 한쪽으론 저수지가, 다른 쪽으론 끝없이 펼쳐진 논밭이 보였다. 가을 수확이 끝난 들판은 황금빛 볏짚이 쌓여 있어 독특한 풍경을 만들었다. 저수지에는 철새들이 날아와 쉬고 있었고, 망원경을 가져온 사람들이 새를 관찰하고 있었다. 이후에는 김제 지평선전시관에 들렀다. 김제 지평선축제를 소개하는 상설 전시 공간으로, 지역의 농업 유산과 가을 수확의 의미를 다시금 느낄 수 있는 곳이었다. 전시관 내부에는 전통 농기구와 쌀 생산 과정을 보여주는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아이들을 위한 체험 공간도 마련되어 있어 가족 단위 방문객들이 많았다. 전시관 밖으로 나서니 탁 트인 평야 지대가 한눈에 펼쳐졌다. 가을의 김제는 시야가 시원하고 마음이 평온해지는 풍경을 가지고 있었다. 지평선이 정말 보이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넓은 평야였다. 전시관 앞 광장에는 포토존이 설치되어 있어 기념사진을 남기기 좋았다. 멀리 모악산이 배경으로 보였고, 앞으로는 드넓은 들판이 펼쳐진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3. 김제 밥상 – 들에서 식탁으로 온 계절의 맛
산책과 사찰 구경으로 출출해진 점심시간, 금산사 인근에서 현지인이 추천한 식당 모악산가든으로 향했다. 백숙정식과 버섯전골은 건강한 향토음식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 특히 모악산에서 채취한 제철 산나물과 버섯이 들어간 전골은 국물이 깊고, 자극적이지 않아 가을 날씨에 어울리는 따뜻한 한 끼였다. 백숙은 닭고기가 부드럽게 익어 젓가락으로 쉽게 발라졌고, 육수에는 한약재 향이 은은하게 배어 있었다. 밑반찬으로 나온 각종 나물과 김치류도 하나같이 정성스러웠다. 특히 도라지무침과 고사리나물이 맛있었다. 주인 할머니께서 직접 담그신 된장으로 만든 쌈장은 구수하면서도 깊은 맛이 일품이었다. 옆자리 손님은 한정삭을 먹고 있어 메뉴도 눈여겨보았는데, 김제에서 생산된 쌀과 채소로 만든 반찬들이 정갈하게 차려져 나왔다. 다음에 다시 방문한다면 꼭 한정식을 먹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식당 주인분께서 김제 쌀의 우수성에 대해 자부심을 갖고 설명해 주셨다. 식사를 하는 동안 창밖으로 모악산 자락이 보였고, 그 풍경을 감상하며 먹는 밥맛이 더욱 좋았다. 식사를 마치고 나오니 오후 햇살이 따사로웠다. 주변을 산책하며 소화도 시킬 겸 천천히 걸었다. 논밭 사이로 난 농로를 걷는데, 가을바람이 상쾌하게 불어왔다. 멀리서 농부 한 분이 트랙터를 몰고 지나가셨고, 손을 흔들어 인사해 주셨다. 김제 시내로 돌아가는 길에는 전통찻집에 들러 차를 마시며 디저트를 즐겼다. 전통차는 지역산 대추차와 쌍화차가 인기였고, 전통다과가 함께 나와 여유로운 오후를 완성해 주었다. 대추차는 달콤하면서도 진한 맛이 났고, 몸이 따뜻해지는 느낌이 좋았다. 함께 나온 약과와 유과는 바삭하면서도 부드러웠다. 지평선축제 기간에는 더욱 많은 사람들이 찾아온다며, 그때 오면 다양한 행사도 즐길 수 있다고 추천해 주셨다.
여행을 마치며
김제 금산사 여행은 천년 고찰이 가진 깊이와 모악산이 품은 자연, 가을 들녘의 여백, 그리고 소박하지만 정갈한 밥상까지. 하루라는 짧은 시간이었지만 참으로 풍성한 감정과 기억을 남긴 여행이었다. 가을에 금산사를 찾는다는 건 단풍을 보기 위해서만이 아니었다. 이곳엔 계절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공간과, 스스로를 되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 있었다. 미륵전 앞에 서서 올려다본 처마의 곡선, 단풍잎이 떨어지는 순간의 고요함, 들판 너머로 펼쳐진 지평선의 광활함, 따뜻한 국물을 마시며 느낀 포근함. 이 모든 것이 가을 김제만의 특별한 경험이었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도 한동안 여운이 가시지 않았다. 풍경 소리가 귓가에 맴돌았고, 붉게 물든 단풍이 눈에 아른거렸다. 다음엔 금산사 템플스테이로 좀 더 오래 머물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천천히 돌아오는 길에 들판 너머 지는 해를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