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주의 탁한 공기를 벗어나 순창으로 향하는 길, 산이 시작되는 경계선부터 공기가 달랐다. 차갑다기보다는 맑다는 표현이 맞겠다. 공기 자체가 투명해지는 느낌이랄까? 강천산 군립공원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입구로 걸어가는데, 물소리가 가장 먼저 나를 반겼다. 아직 계곡에 도착하지도 않았는데도 물 흐르는 소리가 나를 반겨주는 듯 그렇게 이 여행은 시작됐다.
1. 강천산 군립공원
1981년 전국 최초로 군립공원으로 지정된 강천산의 첫인상은 '연속'이었다. 하나 보고 끝나는 게 아니라, 물 따라 걷다 보면 장면이 계속 바뀐다. 병풍처럼 둘러선 바위, 맑은 물줄기, 그 위로 흔들리는 나뭇잎. 초입에서 계곡을 끼고 걷기 시작하면, 병풍처럼 둘러선 바위와 물줄기가 나를 압도한다. 그다음엔 숲의 온도가 서서히 긴장을 풀게 만들어 준다. '호남의 소금강'이라는 별명이 과장이 아니구나 싶었다. 몇 분만 걸어도 그 말이 맞다는 것을 몸으로 체감하게 된다. 특히 흥미로운 것이 '맨발 산책로'라는 왕복 5km 정도 되는 코스인데, 이름 그대로 맨발로 걸을 수 있도록 조성되어 있었다. 나는 실제로 신발을 벗진 않았지만, 그냥 걷는 것만으로도 발바닥에 흙의 감촉이 느껴지는 기분이었다. 어느 순간부터는 정상 찍겠다는 욕심이 사라지고, 그냥 물가 반짝이는 거 보고, 바람에 나뭇잎 흔들리는 소리 듣는 게 좋았다. 돌 위를 밟을 때의 단단함, 흙길을 밟을 때의 부드러움, 나무 데크를 지날 때의 경쾌한 소리. 이 모든 게 오감으로 느껴졌다. 중간에 강천사를 지나면서 절 앞의 고요함이 계곡의 요란함과 묘하게 대비되면서, 이 공간이 단순히 '자연 풍경'만 보여주는 곳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현수교는 공중에 떠는 구름다리로 올라서는 순간부터 긴장이 됐다. 높이가 제법 있어서 내려다보면 아찔한데, 바람 불 때마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무섭다기보다는 감각이 깨어나는 느낌이었다. 보기만 하는 산이 아닌 온몸으로 체험하는 산이었다. 바람이 불면 다리는 살짝 살아 움직이고, 그 미세한 흔들림이 오히려 온전히 그곳에 집중하게 만들었다. 아래로 계곡이 펼쳐지고, 위로는 하늘이 열려 있고, 옆으로는 절벽이 병풍처럼 둘러서 있었다. 마지막으로 120m 높이의 구장군폭포에 가까이 가니 물안개가 얼굴을 휘감았다. 멀리서 보면 절벽을 세로로 찢어놓은 듯한 광경이 압도적이었다. 소리도 엄청났다. 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계곡 전체를 뒤흔드는 느낌이었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물보라가 거세졌고, 옷이 조금씩 젖었지만 신경 쓰이지 않았다. 그냥 그 압도감 속에 서 있고 싶었다.
2. 채계산 출렁다리와 전통고추장민속마을
강천산에서 내려오는 길에 주변 명소를 더 보고 싶은 마음이 남아 있었다. 그래서 들른 곳은 채계산 출렁다리였다. 국도 24호선을 사이에 두고 갈라진 두 채계산을 잇는 현수교인데, 길이 270m에 최고 높이가 75~90m 정도 된다고 했다. 강천산의 현수교가 계곡 속 숲의 긴장감이었다면, 채계산 출렁다리는 능선과 계곡을 한눈에 보는 조망 동선이 강했다. 위로 올라서니 바람이 달랐고, 아래를 내려다보니 지형이 입체적으로 펼쳐졌다. 책을 포갠 듯한 겹능선이라는 설명처럼, 산의 모양 자체가 독특했다. 실제로 능선이 여러 겹으로 포개진 모습이 마치 책장을 펼쳐놓은 것 같았다. 바람이 세게 불 때 다리가 흔들리는 느낌도 강천산보다 더 강렬했다. 그 짜릿함이 싫지 않았다. 채계산 출렁다리에서 내려와 늦은 오후 순창 전통고추장민속마을과 발효테마파크에 들렀다. 우리나라 전통 발효식품인 고추장, 된장의 전통적 제조비법을 이어가기 위해 조성한 마을로 전통장류산업을 활성하는데 큰 기여를 하고 있단다. 발효테마파크는 발효·미생물·효모를 주제로 전시와 놀이, 체험 요소를 갖춘 공간이었다. 고추장 한 숟갈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숙성되는지까지 보게 되니까, 식탁 위의 고추장과 된장의 소중함이 느껴졌다. 아이들과 함께 온 가족들이 많았는데, 체험 프로그램이 잘 되어 있어서 그런 듯했다. 나는 혼자 왔지만, 다음번엔 누군가와 같이 들러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른은 어른대로, 아이는 아이대로 각자 흥미로운 포인트를 찾을 수 있는 공간이었다.
3. 순창 맛집
여행지 식사는 검색해서 가도 기대에 못 미치거나, 웨이팅이 너무 길거나, 아니면 아예 문이 닫혀 있거나 한다. 순창은 달랐다. 고추장과 된장 등 발효식품이라는 테마와 연결된 맛집이 여기저기에서 쉽게 찾을 수 있었다. 고추장과 된장을 소스로 한 불고기 정식은 누가 만들어도 맛있는 거 같다. 왜냐하면 양념 자체가 이미 깊은 맛을 내고 있기 때문이다. 주민들에게 맛집을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강천산을 입구 근처 어디든 들어가도 산채비빔밥·한우버섯전골·더덕구이 등을 먹을 수 있다. 나는 산채비빔밥과 더덕구이를 먹었다. 어느 계절이나 잘 어울린다. 겨울이면 따끈한 된장국이 곁들여서 같이 나온다. 등산객에게 딱 맞는 메뉴이었다. 무겁지 않게 시작해서 든든하게 마무리되는 산채비빔밥은 나물 종류가 다양했고, 간이 세지 않아서 먹기 편했다. 특히 더덕 향이 산에서 맡은 향과 어우러져 휴식의 연장처럼 느껴졌다. 식당 분위기도 차분했고, 사람들이 많았지만 소란스럽지 않았다. 등산 후 한 끼로는 정말 좋은 선택이었다. 저녁은 순창 읍내로 내려와 고추장불고기 1인분과 청국장을 시켰는데, 여기서 중요한 건 맛의 강약이었다. 고추장불고기는 고추장의 단맛과 매운맛이 먼저이지만, 불향이 뒤에서 받쳐주니까 질리지 않았다. 불향이 없었다면 그냥 단짠 조합에서 끝났을 텐데, 불 맛이 더해지면서 여러 맛이 입 안에서 조화를 이루었다. 청국장도 진했다. 구수함이 확실했고, 된장찌개와는 또 다른 깊이가 있었다. 반찬도 장아찌와 무침 등 된장과 고추장을 소스로 가미하여 전체적으로 구수하고 깔끔하면서 개운한 맛을 느끼게 했다.
여행을 마치며
강천산 군립공원은 전국 최초 군립공원이라는 시간의 무게, 왕복 5km로 안내되는 맨발 산책로가 만들어주는 감각의 깊이, 120m 높이에서 떨어지는 구장군폭포의 압도감, 그리고 현수교를 건너며 온몸으로 느껴지는 자연의 신비. 여기에 채계산 출렁다리 270m 횡단이 주는 짜릿함, 발효테마파크와 고추장민속마을의 전통의 힘, 마지막으로 고추장불고기와 청국장까지 자연이 마음을 씻어주고, 전통이 생각을 채워주고, 밥상이 하루를 다독여줬다. 순창을 떠나오면서 "다음엔 누군가와 꼭 함께하고 싶다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