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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수학여행 세월호 참사 개요, 원인, 사회적 변화

by 미래 줌마 2025. 3. 31.

수학여행 참사

1. 세월호 참사 개요

2014년 4월 15일 인천항에서 청해진해운 소속의 여객선 세월호가 짙은 안개로 두 시간 지연된 상태로 출항하였습니다. 오전 7시경 진도 해역으로 들어섰고, 8시 50분경 단원고등학교 학생이 119 전남소방본부에 선박의 침몰 사실을 최초로 신고하였고, 9시 30분경 목포해경 경비정이 사고 현장에 도착하였으나, 자력으로 배에서 빠져나온 승객과 선박직 승무원들만 구조하였다. 11시경 안산 단원고등학교는 학부모들에게 해경으로부터 전원 구조 통보를 받았다는 문자를 보냈고, KBS는 뉴스특보를 통해 단원고 학생 전원 구조라는 뉴스를 전하였습니다. 그 시각 목포 해경구조대가 선내 진입을 시도하였으나 강한 조류로 실패하였고, 11시 30분 세월호는 배의 앞부분 일부만 남기고 전복된 채 수면 아래로 침몰하였고, 4월 18일 오후 1시 30분에 배의 앞부분마저 가라앉아 완전히 침몰하였습니다. 세월호에는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단원고 학생 325명 중 250명이 사망하고 교사 11명이 사망하였으며, 일반인 사망자는 43명으로 집계되었으며, 총 304명이 사망하였습니다. 구조자는 단원고 학생 75명, 교사 3명, 일반인 94명으로 총 172명으로, 어린 학생들의 피해가 컸기에 국민들의 사회적 충격이 엄청나게 컸습니다. 이 사고로 단원고가 있는 경기도 안산시와 사고 해역이 있는 전라남도 진도군은 특별재난지역으로 선포되었으며, 안산 올림픽기념관과 안산 화랑유원지를 시작으로 전국에서 분향소가 설치되었습니다. 이 사고로 대한민국 현대사에도 큰 영향을 끼쳤으며 엄청난 후폭풍이 닥치게 되었습니다. 국민들은 참사가 일어난 것에 애통해하며 함께 울었으며, 어떻게 일어나게 되었는지, 사고의 원인이 무엇이었는지 알고 싶었고 책임자는 강력히 처벌받기를 원했습니다. 하지만 정부는 은폐하고 회피했으며, 이해할 수 없는 정부의 태도에 국민들은 분노하며 시국 선언문을 쏟아냈으나, 정부는 유가족 간의 갈등과 분열을 조장하며 국민들의 시선을 돌리려고만 했습니다. 이후 국민들의 분노는 촛불 집회로 이어졌으며, 자녀 교육에 열과 성을 다하기로 소문난 한국 학부모들의 마인드를 크게 뒤바꾸어 놓은 전환점이 된 대형 사고이었습니다. 결국 이 사건은 안전불감증에 빠져 있던 대한민국의 안전 관리 실태와 혼란스러운 사회의 극치를 보여준 비극적인 사건으로 평가되었습니다. 세월호 참사로 인해 당시 출범 2년 차였던 박근혜 정부는 물론 대한민국 사회계, 정치계는 모두 엄청난 후폭풍과 침체, 그리고 공황에 시달렸으며, 이후 수많은 갈등이 야기되었는데, 이는 참사를 수습하기는커녕 오히려 갈등을 조장하여 그 상황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고 했던 정부의 잘못은 말로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21세기의 대한민국 사회에서 매우 큰 사회적 파장과 영향력을 준 사건 중 하나이기도 하며, 대한민국의 해상 사건 사고 중에서 3번째로 많은 사망자를 낸 침몰 사고이며, 전 국민들에게 안전의 중요성을 결정적으로 깨닫게 했습니다. 대한민국의 수학여행 사건 사고 중에서는 가장 많은 사상자를 냈으며, 한 학교의 학년 전체가 참사를 당한 것 또한 최초로 이전까지 최대의 참사는 1970년 경서중학교 학생 45명이 사망한 모산 수학여행 참사였습니다.

2. 세월호 참사 원인

사고가 일어나게 된 직접적인 원인은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은 상황입니다. 정확히는 여러 원인들이 있지만 기술적 한계로 인해 확증이 불가능한 상태이며, 사고 원인에서 주목할 것은 최초로 배가 기울어진 이유를 아직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현재까지의 결론을 정리하자면, 2014년 참사 초기 검찰은 조타수의 조타 실수를 사고 원인으로 발표했으나, 이에 대해 2015년 4월에 열린 선원 재판에서 조타기의 고장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며, 조타수의 조타 실수에 의한 과실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참사의 원인을 알 수 없었기에 사람들은 세월호의 참사 원인에 대해 크게 두 가지로 나뉘어 주장했습니다. 배 자체에 문제가 있었다는 내인설과 외력의 존재를 배제할 수 없다는 주장인 외력설이 대표적입니다. 사고 원인을 밝혀야 한다는 목소리가 점점 커졌고, 2015년 특별조사위원회가 출범하여 사고의 진상을 규명하려 했으나 예산을 삭감하고 위원 임명을 지체하는 등 정부의 방해로 별다른 성과 없이 1년 만인 2016년 9월에 강제 종료되며 종합보고서 대신 중간점검보고서만 내놓고 활동을 접어야 했습니다. 이후 세월호 선체가 인양되면서 2017년 4월 출범된 선체조사위원회에서는 활동이 끝날 무렵에야 인양된 세월호를 조사하며 조타 장치의 일부인 솔레노이드 밸브의 고장을 사고의 원인으로 지목했으나, 제대로 된 조사가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위원 6명 중 3명 만이 솔레노이드 밸브 고장에 대해 동의하고, 나머지 3명은 솔레노이드 밸브 고장 외에 다른 가능성에 대해서도 조사를 해야 한다며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선체조사위원회 위원들은 합의에 이르지 못하고, 2018년 8월 활동을 마치게 되었습니다. 솔레노이드 밸브에 대한 조사는 2018년 12월부터 2022년 6월까지 활동한 사회적참사특별조사위원회에서 이어나갔는데, 솔레노이드 밸브 고착이 세월호의 급격한 우선회와 횡경사를 유발했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라고 결론 내리며 조타기의 고장 가능성은 없으며, 외력에 대해서는 "외력의 가능성을 열어 놓고 확인한 결과, 세월호 선체 외부 변형 손상의 원인은 수중체 접촉에 의한 외부충격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라고 결론지었으며, 역시 세월호 침몰 원인에 대해서는 결론을 내리지 못했습니다.

3. 세월호 사회적 변화

세월호 참사는 여객선이 침몰하는 순간을 국민들이 지켜보고 있었음에도 그들을 구해 내지 못하였다는 사실로 인해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또한 참사의 전후 상황에 대한 여러 가지 의혹이 명백히 밝혀지지 않은 채 유가족에 대한 명예 훼손과 인신공격 등이 이어지면서 유가족과 연대하고 정부에 진실 규명을 요구하는 시민사회의 힘은 2016년 박근혜 퇴진운동에 하나의 동력으로 작동하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학생들에게 “가만히 있으라.”는 명령을 하고 선장과 선원들이 탈출하였다는 점에서 기성세대의 반성과 책임을 요구하고, 안전 사회 구축의 필요성에 대해 사회적 공감대를 불러일으키게 하였습니다. 무엇보다 유가족이 직접 시민들을 만나고 정부에 대항하며 진실 규명을 요구하고, 더 나아가 안전 사회 구축을 위한 연대 활동, 민주시민교육과 생명안전공원 조성 요청 등을 주도해 가면서 사회가 가지고 있는 ‘유가족’이라는 편견을 깨고 있으며, 사회적으로 보다 깊은 애도와 기억이 가능하도록 하는 원동력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세월호 참사는 한국 사회에 안전 불감증, 정부의 위기 대응 문제, 언론의 역할 등 여러 방면에서 깊은 영향을 미쳤으며, 이후 정치·사회적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사회적 변화의 첫 번째로 대한민국에서 안전 의식과 시민사회 운동이 더욱 활성화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특히 유가족과 시민들이 진상 규명을 요구하며 광범위한 활동을 펼쳤으며, 4.16 세월호 참사 특별조사위원회를 구성하였으며, 잊지 않겠습니다 라는 문구가 시민사회 운동의 상징으로 자리 잡게 되었으며, 진상 규명 및 안전 사회 구축 요구가 지속적으로 진행되었습니다. 두 번째로 정치적 영향과 정부 개혁을 위해 박근혜 정부의 위기관리 능력 부족을 부각시키며 정치적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2016년 박근혜 대통령 탄핵과 함께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세월호 재조사 진행되었으며, 국민안전처 신설 및 해경 개혁 추진하였습니다. 세 번째로 해양안전법 개정, 선박 관리 강화, 긴급 대응 시스템 개편 등의 안전 대책을 강화하였습니다. 선박 안전 검사 강화 및 승객 보호 조치 법제화, 학교 안전교육 의무화 및 대피 훈련 확대 및 국가 재난 컨트롤타워 역할 재정립 하였습니다.